정제염. 청매. 콘텐츠 팔이.
선택하지 않으면서 방관하는 것만 한 죄는 없다. 정선태 교수님의 말이다. 그날이 루쉰에 관해 이야기 나누던 시간이었는지, 벤야민에 대해 말씀하시던 순간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저 문장은 아직도 목구멍에 맴돈다. 선택하지 않으면서 중립처럼, 마치 모든 것을 아는 듯이,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 때로는 저건 이래서 아니고 저것은 이것 때문에 아니라고 말하기는 참 쉽다. 그른 것을 지적하는 일은 반박당할 이유가 드물고, 깊게 말하지 않아도 문장에 힘이 있어 보인다. 그게 어떻게 되게 만들어야 하는지, 그게 본래 무엇인지, 어떻게 해서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고, 어떻게 해야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다.
나는 농산물을 팔고 있지만,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인데, 이 역시 저 이야기와 닿는 부분이 있다. 콘텐츠라는 것은 자극적이고, 한끝 방향에서 색이 진할수록 눈에 잘 띈다. 그렇게 눈에 띄는 콘텐츠는 내실이 충만한 경우가 있고 빛만 번지르르 한 경우가 있는데, 빛만 번지르르 한 경우를 두고 콘텐츠 팔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청매가 옳지 않고, 황매가 옳은 것이냐' 라는 질문의 답은 수천 가지이다. 반면, '익은 과일이 제 맛이다.'라는 문장에는 이견이 없다. 둘다 펙트를 말하지만, 각자 마침표를 찍는 위치가 달라서이다. 청매의 발상은 유통의 어려움에서 시작되었고, 소비자들의 무관심에서 싹이 피어났다. 오히려 매실은 청매의 대치어로 황매를 만들었고, 그 중간 단계로 녹매라는 단어까지 만들어야 했으니, 참 쉽지 않은 상황.
매실은 본래 노랗고 익혀야 제향이 깊다. 콘텐츠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그에 대해 제대로 알리는 사명이 있어야 하는데, 콘텐츠 팔이를 업으로 하는 분들을 뵙자면, 제대로 알리는 것보다, 제대로 튀는 것에 초점을 둔다. 예를 들어
[1] 청매는 독이 있으니 먹지 말고, 황매를 찾아야 한다 와
[2] 매실은 본래 노랗고 향 깊으며 황매로 매실액을 담가야 한다
이 두 문장은 청매 보다 황매를 옹호하는 글이지만, 상당히 다르다.
[1] 문장은 이른바 색이 짙은 한 측면의 끝에서 본인이 이야기하는 우월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2] 번 문장은 청매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황매의 우월성에 대해 말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청매의 알싸한 맛이 좋아서 굳이 청매로 매실액을 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 들인가? 독 있는 지도 모르고 먹고 있으니 무식쟁이고, 독 있는 거 알면서 농부는 재배하고 팔고 있으니 죄인이고, 판매자는 그 사실도 제대로 모르면서 혹은 어느 정도 알면서도 판 이들이 많으니, 범죄자일까?
원래 모든 씨앗엔 독이 있고, 덜 익은 씨앗엔 그 성분이 짙다. 이는 그들이 수천 년 또는 수만 년간 살아내기 위한 본능이 그들의 성질에 뭍은 결과이다.
여기서 팩트는
'씨앗은 독을 가지고 있다.' '독의 양이 얼마인지는 모른다. ' 독이 얼마 정도의 치명성을 가진지 모른다'. '덜 익은 과수의 씨앗은 독성이 더 강하다.' '매실은 본래 노랗다.' '익은 과일은 향이 깊다.' ' 익은 과일은 더 영양가가 높다.' '익은 과일의 씨앗의 독성은 덜 익은 것보다 덜하다.'
정로도 볼 수 있겠다. 여기서 무엇을 먼저 보여주고, 무엇을 감추고, 또 무엇을 강조할지는 콘텐츠를 만드는 이의 몫인데, 제대로 된 콘텐츠를 만들고 전달하고자 함이 아니라, 문장의 명확함보다 인상적인 글을 위해 글발을 날리는 분들의 글은, 문장을 현란하게 채색하기에 바쁘다.
유기농.
첫 사업 피티를 마치고, 투자사 담당자님과 미팅하면서 사업을 평가받은 적이 있다. 그분은 며칠 간 농업에 관해 나름대로 탐구하고 방법을 모색하고 진실들을 찾아보셨다고 했는데, 몇일간 그렇게 준비하셨던 (또 매우 우호적이었던 ) 그분의 첫 마디는,
" 유기농으로 키우면 풀들이고 뭐고 안 잡혀먹히려고 독성을 더 가져서 몸에 안 좋다던데요."
( 본론에 앞서 말을 한마디 붙이자면; 유기농 이 3글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본래 본성 그대로 환경적으로 키우는 노력이 지속 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농약도 정말 잘만 쓴다면 독이 아니라 약이 되는 순간이 있다. )
모든 먹을거리는 독성이 있다. 아니 자연물 전체가 그러할 것이다. 그것은 독성에 대한 기준이 사람을 중심으로 놓여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얼마나 들어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있느냐 없느냐만 가지고 구분한다면, "모든 먹을거리에는 독이 있다."
다만 그 독이 치명적인가, 그 독을 습관적으로 먹으면서 내성이 생겨 건강이 증진되는 일은 없는가?
등의 문제가 먼저 논의 되어야 하지,
"00에는 독이 있으므로 배척해야 한다 문장이 얼마나 육감적이고 답답한 문장인지 알아야 한다.
이런 부류의 분들이 주로 근거로 제시하는 게 "과학적" 또는 "논리적"이라는 말을 붙이는 문장들인데, 갈릴레오가 자신의 주장을 필 때 반대하던 이른바 과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논리적"이라는 말로 그의 의견을 부정했다. 수치를 들어 설명하거나 이유를 대고 무언인가를 반박할 때에는, 상대 논점이 수치만큼 현상적이어야하는데, 수치라는 보여는 논리로, 무형적인 것들을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지식을 자랑하는 일인데, 보다 명확한 지적을 위해서는 수치로드는 설명만큼, 지적하는 요소도 명확해야한다.
그리고 그 수치가 적합한 것인지 자문해야하는데, 예를 들어 광화문에 시위 인원이 경찰추산 00명, 집회측 추산 000명 일때,
A 아니 사람이 그렇게 많이 나왔는데, 예전 시청행사도 000명 이상이라더니 00명이 맞소이까?
B 면적당 이렇게 계산했으니 맞습니다.
여기서 면적당 인원은 수치이다. 수치인데, 맞는 수치일까?
움직이고, 걷고 누구를 만났다가 헤어지는 현장에서 수치는 순간 고정되어있는 사람들의 수, 도보속도 움직이는 사람들의 수, 교통수단을 이용해 인근에서 왕래한 사람의 숫자 등이 거론되어야 수치이다. 그렇게 완벽하게 모든 수치를 말했다하더라도, 부족하거나 미흡한 것은 늘 있기 마련이다. 해서 자문해야한다. 정말 맞는 것일까?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있던 것의 발견이다. 본래 없던 것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던 것을 해석하고 대화하기 위해 언어를 만들고, 그 대화를 후에도 지식으로 남기기 위해 문자를 만들고, 모여진 문자들을 분류해 학문을 만들었다. 그렇다 해도 있던 것들을 다 인식하지 못해 공간에 대해, 차원과 속도에 대해 이론을 만들고 끊임없이 검증하고 실패하는 오류를 반복한다. 그러면서 실체에 접근하는 것이다.
먹을거리와 영양은 어떠한가? 과연 지금의 지식의 기준이 우리가 안다고 말하는 것들이 전부일까? 라는 질문을 콘텐츠로 만드는 사람은 어떤 학문에 앞서서 전달하는 입장에 선 사람들은 할 수 있어야 한다.
천일염. 물론 천일염 생산 방식이 무조건 옳지는 않다. 그리고 전통이라고 해서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다. 오랜 시간 축적하고 불필요하거나 잘 못되어서 개선한 여러 요소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고, 그것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질문해야한다.
천일염을 일제부터 만든 소금의 제조방식이라 전통도 아니라고 말하는 견해. 그렇다면 한정식이라는 밥상의 구조는 어떠한가? 과연 조선부터 있었을까? 언제부터 존재하는 것을 우리는 전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근래 한정식이 보이는 음식을 한 상에 쫙 펼치는 전개형 구조는 근대에 만들어진 유산이다. 이는 전통일까? 역사가 짧으니 전통이 아니고, 우리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천일염이 근대에 만들어져 전통이 아니라면 자염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 그 유례가 어디이건 한국에서 쓰였을 때, 천일염은 자염에서 몇 요소를 제하고 다시 만든 방법 아니었을까?
천일염의 그릇된 점을 꼬집기 위해서는, 천일염 생산 방식에서 물을 가둘때 바닥재라든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는 위생적인 부분에 대해 꼬집어야 한다. 헌데 천일염을 싸잡아 먹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정제된 소금을 건강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왕 먹을 것이면 정제염을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팩트의 허구.
사실은 있으나 진실은 없다. 글을 쓰는 이들은 본인이 아는 것들을 문자로 또 문장으로 정립하고 편집해서 콘텐츠를 쏟는다. 글의 양식에 따라 다르겠지만, 전달하는 것이 목적인 콘텐츠는 사실에 기반을 둬서 작성되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서 사실은 늘 진실은 아니다. 위에서 말한 매실의 경우처럼 부분의 사실을 전체인 양 서술하는 것.
참 아쉽다.
참 많이 아쉽다.
콘텐츠 팔이와 작가의 명칭은 종이 한 장 차이. 어떤 위치에 서 있는 가는 그가 쓴 글들이 쌓여 말해줄 것이다. 선택은 펜을 쥐는 날이 아니라 마침표를 찍는 순간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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