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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밥다반사/서툴러도 괜찮아

후쿠시마 원전사태 일주년, 후쿠시마 이후를 묻는다 - 디아스포라의 눈 서경식 한홍구 대담



후쿠시마 원전사태 일주년, 후쿠시마 이후를 묻는다 
 

서경식 선생님과 한구라 한홍구 선생님의 대담이 진행중입니다.
 

1. 후쿠시마와 농민


 

그냥 두면 저 논처럼 엉망이되기 때문에 하루 한두시간 만 정리를하고있어요. 누가 알려준것은 아니고 내 스스로 정한 것이죠

건강에 문제가 생길 까봐 그러신 것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지금 농사를 이곳에서 짖고 계십니까

아니요 그럴수 없어요 방사능이있어서 이곳에서 벼를재배하변 방사능이 벼에 흡수되죠. 정말 심고싶지만,,,


2. 후쿠시마와 한국인 그리고 조선인



1945 년 당시 후쿠시마에는 만칠천명의 조선인이 거주하고있었습니다, 조선인의 노동력을 이용해 금광 채굴을 하기위함이었는데요. 

일본은 이 사건을 일본의 피해라고 말하지만 사실이건 조선인들의 피해 입니다. 

이주한 아이들은 외각지역에 살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부모님을 보러옮니다. 

"오염물질 제거 비용 육백만엔 
풀이 자랄수록걱정이에요 이풀들을 어떻게해야할지"


3. 먹거리 





"일본 정부는 지금 모든 반응에 대해 "너무 예민한거 아니야?, 여자같이 말이야?" 라는 태도를 일관해 오고 있습니다. 오사카 시장의 경우 자신이 반핵주의자기 때문에 따로 조례같은건 필요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있구요. 이런 사람을 지지 하는 분들이 상당 수 입니다. 일본은 파시즘의 국가입니다. 국외에서 전파를 타고 퍼져간 후쿠시마 원전 관련 영상이 
일본내에서 방영이 안되었습니다.

 일본정부는 방사능 검출 기준 자체를 바꾸었씁니다.! 우리는 먹거리에 관해서 너무 예민하다라고 일관하고 있는 일본 정부에 대해 인식하고, 그에 맞서 문제를 의식 하는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서경식 - 교토 시에서 태어났다. 와세다 대학 재학중이던 1971년, 대한민국에서 공부하던 두 형이 서울에서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당시 서승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과정에, 서준식은 같은 학교 법학과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한차례 방북 사실 때문에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서승은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서준식은 7년형을 선고받았다.[1] 곧바로 체포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어머니와 그들을 돕는 사람들과 함께 구호 활동을 폈다. 1974년 와세다 대학 제일 문학부를 졸업했으나 여전히 형들이 옥중에 있어 진학을 포기하고 형들의 석방과 한국 민주화 운동을 위한 활동을 계속한다. 그사이 어머니는 1980년에 사망했다. 투옥 17년째인 1988년에 서준식이 석방되고 1990년에는 서승도 석방되었다. 장기적인 구호 활동의 경험은 이후의 사색과 문필 활동으로 연결되었다. 인권과 소수 민족을 주제로 한 강연 활동을 많이 펼쳐 왔다. 2000년에 동경경제대학 부교수가 되었다.

작가 활동은 다방면에 걸쳐 있으며 그 근원은 형 2명의 구출 활동 경험과 함께, 재일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부터 2년간 대한민국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