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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아주세요 - 우리가 진 빚에 관하여 빛에 대하여] 
2011년 한미 FTA 반대집회. 농업에 몸을 담겠다 마음 먹었지만, 운동권이란 글자는 참 가까우면서도 멀었습니다. 싫었다고나 할까요?
거리에서 무엇을 향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재법 익숙해진 것도 같은데, 제게는 참 어색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보다 십년 전, 효숙이 미순이 사건이 있었을 때, 대학로에서 친구따라 집회장에 들린 것이 처음이었는데, 거리에서 무언가를 말하고, 거친 찬송가 같은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나와는 전혀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당시만해도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 한다면, 사회복지단체를 만들거나, 정치를 하거나, 무엇인가 일을 만들어 그 것을 해결하는 직접적인 어떤 것을 행해야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시간이 없다면, 당장 시간이 비는 틈틈히 봉사활동을 하면서 본인이 당연하다 생각하고 지키고 싶은 것들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는 제 눈에 비친 사람들. 거리에서 때창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달갑지 않았습니다. 효순이와 미순이의 사건에 대해 분개해, 그자리에 서긴 했지만, 여기서 외치는 것보다, 법률을 바꾸고, 도로옆에 인도가 날수 있게 무엇인가를 하고, 하다 못해 동장이라도 꼬셔서 구청장이라도 만나고, 보다 직접적인 행동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싫었습니다. 거리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도, 실행하지 않으면서 둘러 앉아 뜬구름 잡는 듯한 이야기를 하고, 현실과 참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구나,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구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광우병 파동이 났고, 용산 참사가 있고 또 집회 현장에서 그곳에서 또 쭈뼛 서 있었습니다. 이런 거지 같은 일이 있나! 하면서 그곳에 섰지만, 집회 현장마다 늘 맨 앞에서는 00 00 000, 학교 들의 현수막이 온전히 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아직도 마음은 보다 직접적인 무엇을 해야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죽어라 법전을 파서 법무부 장관이라도 되어서, 하나 하나 다 뜯어 고쳐야 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


[공식과 개인의 차이]
그리고 2011년 겨울 한미 FTA 반대 집회가 광화문에서 열렸습니다.
존경하는 스승님의 권유로 참석하기는 했지만, 집회장을 가는 내내 떠나지 않는 물음. 내가 이 곳에 감으로서 무엇인가 했다고 자위하려고하는 것은 아닌가? 나도 참여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 시키려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보다 중요한 일이 또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회사의 대표인데, 이렇게 움직여도 될까? 혹시나 회사에 불이익이 있지는 않을지 나는 고민해야하는거 아닐까? 그게 더 큰 책임 아닐까?
그날 저는 무리의 맨뒤 편에 서있었는데, 청와대로 가는 길이 막혀 국회의원들이 필두로 세운 선두 그룹은 무리를 역방향으로 질러 제가 있는 곳까지 왔습니다. 불현듯 시위 현장의 제일 앞에 서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야 말로 아수라장. 가냘픈 몸의 이정희 의원, 정동영, 노회찬, 전경과 시위대가 부딪히면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시위대는 같이 있는 무리중 누구가 다칠까봐 서로를 서로가 보호했고, 전경들은 4열 종대로 벽을 쌓고 있었는데, 맨 뒷열에 고참들이 맨앞의 신병으로 보이는 청년들에게 무어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밀집되면 아무리 건장해도 숨을 쉬기가 힘들어집니다. 가슴으로 등으로 압박이 오는데, 이건 도무지 헤어 나올수 없는 힘이더군요. 제 앞에 있던 전경은 눈이 돌아갈듯 말듯 실신 전이 었고,
저는 헬멧을 잡고 그친구를 계속 깨웠습니다. 정신차려! 그리고 외쳤습니다. 니들 안넘어 갈테니까 예좀봐 니들 애가 죽어 임마! 좀 만 뒤로가! 소리를 고래고래 치니 뒤쪽에 있던 고참 전경들이 틈을 내었고, 그 친구는 숨을 다시 쉬기 시작했고 뒷편으로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모두가 쓰러졌고, 난장판.
그렇게 11년. 사회를 바꾸자는 마음은 살면서 갖은 적이 없었던 것 같고,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은 종종 들었던 이십 대. 그때서야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둘밥과 이어서 생각 했습니다. 둘밥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정상이 저곳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등산로 표짓판 하나 없어 보이는 길이 명확하게 보였고, 저렇게 가면 되겠다 싶은 것이 참 쉬워보였으니까요. 하지만 그길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뿌옇게 다 흩날리고, 보았던 정산은 없고, 내딘 발을 디딜 곳이 어디인지 분간도 못하겠던 시간.
발걸음마다 다잡고, 한 걸을 내던 시간, 그렇게 쌓여 여전히 정상은 어딘지 알 수도 없지만, 어떻게 발을 뻗어야 길로 가는 것인지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던 순간.
무엇인가를 푼다는 것. 해결한다는 것. 바꾸고자 한다는 것.
피력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실행하며 오늘을 살고, 하루를 채워 만드는 사람들이 있고, 그 문제에 끝판왕이 되어서 그거 한번 해결하자 마음먹고 나서는 사람이 있고, 거리에서 이일은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고 외치는 사람이 있고, 그걸 업으로 하는 사람이 있고,
[아니 아니,]
그런 순간들이 있고, 바로 실행하는 순간, 끝판왕이 되어야하는 순간, 그리고 외쳐야하는 순간들이 있어야한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 것 같았습니다. 직접 실행하는 방법 하나만으로는 알리는 것도, 실행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서로가 각자의 방법으로 풀고, 또 각자의 방법들이 이렇게 모여 거리의 외침이 되기도하고, 직접적인 행동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아니, 그렇게 해야 조금씩 조금씩 지향점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내일 당장 회사가 망할 수 도 있고, 아무리 봐도 목숨 줄이 길어 그럴 일 없겠지만, 내일 당장 사고로 무슨 일이 날수도 있는데,

내가 해야할 말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산다면,
이 일을 하는 이유조차 없는 것이 아닐까?
무슨 의미 일까? 그렇게 사는 것이.
해서 말하며 다니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할말 안할 말 또 쓰잘데 없는 말까지 하면서, 둘밥은 대외협력이 안되는 곳이야라는 말을 들어도, 뱉으며 다녔습니다.


[가래는 뱉고 침은 삼켜야 하니까요. ]
그리고 지난 주말 백남기 농부님의 부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대전에서 서울을 오는 길이었는데, 운전하는 내내 같은 말이 맴돌았습니다.
뱉으며 살아야한다고 진작 마음은 먹었고 행동하며 살았지만, 마음먹었다고 해서 늘 강령하게 기운이 있는 것이 아니니,
고민했습니다. 회사에 불이익이 있지는 않을까? 조문만하고 올까? 내가 간다고 뭐가 달라질까?
나는 또 내 일의 정당성을 위해 면피할 카드 하나 만들기 위한 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한참 을 같은 문장들을 되뇌다가.
가래는 뱉고 침은 삼키자!
자정무렵 도착한 장례식장. 지쳐보이는 기자들, 무엇인가를 하지만, 너무 많은 것들이 한번에 몰려 마음진정이 어려운 사람들. 그리고 창피한 고백 하나 하자면, 그곳에서 나는 몇시에 돌아가야하는 가를 고민하다가, 아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굳이 아는 사람을 찾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데, 내가 대접 받을 사람도 아니지만, 누구를 보기위해서 온 것도 아니고, 보여 주려고 온 것도 아닌데, 아는 사람을 찾는 눈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리고 한켠에 마련된 밥차에서 컵라면 하나를 얻어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밥차에 생명밥차라고 써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보고자 했고, 여쭈었습니다.
떡꾹을 끓이 실건데 김치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김치.
그리고 많은 분들의 도움과 농부님들의 함께함으로 김치와 부식거리를 전해드렸고,
왠지 남은 떡꾹이 참 먹고 싶었습니다.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는데, 이걸 했으니 이건 먹어야지 그런 마음은 아닌데,
아 이걸 먹으면 그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참 맛있더군요. 너무 맛있어서 참 쓰렸습니다.
오늘은 몇일 식사 제대로 안되서 밥을 꼭해서 주고 싶다고하셨고, 육계장을 끓여주셨습니다.
[빚지고 산다는 것. ]
오늘 친구 몇에게 연락이 왔는데, 달에 몇 만원 적금 드는 일조차 쉽지 않은 저랑 비슷한 녀석들은 묻지도 않았는데, 나서서 본인이 당장 가지고 있는 것의 반을 때어주었고, 보다 풍족할 것이다 생각했던 녀석들은


"다 아타깝지~ 돌아가셨는데 그냥거기까지만 알고있을래 내가여기서 그럼 난 저거 다르게생각해하면 넌또 반발할껄? 그냥 정치문제로 우리끼리 티격태격하기싫어서 중립취하는거야 ㅋㅋ" 라는 말이 돌아 왔습니다.

제가 전후 사정 설명이 없이 돈만 먼저 이야기 한 탓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했습니다. 빚지고 산다는 것.
제가 군에 있을 때, 군막사 울타리가 나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는 구나 하고 생각할 무렵. 내가 이 시간에 여기 있어서 서울에 있는 사람들은 두다리 피고 자는 거야. 그들은 내게 이런 점에서 빚을 진다는 것 알까?
빚이라는게 대출 처럼 보이지 않는 무게가 있어 사람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게하는 빚. 우리가 직장에서 보다 편한 조건으로 일할수 있었던 것에 대해 전태일을 기억하고, 무조건 적인 계급으로 짚밟히고 사는 것이 아니라 선거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부정선거를 규탄하다 시신이된 김주열, 민주화라는 세글자의 무게에 대해 이한열 박종철, 그외에 내가 참 모르는 삶을 그것을 향해 던져 준것도 미안한데, 건강까지 그리고 목숨까지 잃은 그들에 대해 진 빚.
나의 하루가 그런 빚이 있다는 것을, 아침이 그러한 빚으로 채워져 찬란한 것임을 알아야한다는 것.

빚지고 산다는 것.
친구 넷이 있는데, 한 친구 아들이 세월호 같은 말도 안되는 일로 죽고, 그일 너무 짜증나 또다른친구가 "내 친구 아들에 대해" 분개하고 외쳤다가 경찰의 무자비함으로 죽었을 때, 나머지 두친구 중 한명이 같이 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자고 했을 때, 옆에 있던 나는 중립을 지키겠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그건 이념이 다른 문제가 아니고, 제대로 안된, 또 잘 못된 문제인데, 다른게 아니고 정말 틀린건데,
그때 나는, 오늘 나의 일이 아니기에 중립을 지키겠다 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비가오는새벽. 아침 볕이 밝아 올 시간이 다가오는 지금. 빚져서 감사합니다.
그 빚 잊지않겠습니다.  

그리고 그 빚을 같이 기억하고,

 잊지 않아주신 당신.

 

이 육계장 한 그릇, 참 맛나게 끓여주신 #생명포차 그리고 힘 실어주신 당신.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먼발치에서 #이게정말둘러앉은밥상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생명포차를기억해주세요

  

#같이잊지말아주세요

 

시신을 부검하는 일은 그냥 부검이 아닙니다 고인의 신체 훼손도 한 이유지만 그것보다도 91 년 안치실 벽을 깨부스고 시신을 훔쳐갔던, 이 나라 이 국가의 개인의 존엄에 관한 문제이자, 수 십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은 힘으로 민중을 대중으로 분산 시키는 권력의 더러움에 관한이야기입니다.


 

#당신의관심이필요하며

#할수있는일은찾아서하는것이지

#할수있는것들이백화점처럼진열되있진않습니다.

#손쉽게구매하는것이라니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그렇게만드는것이 

#이세상입니다.